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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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우는 그날따라 아주 늦게 잠에서 깨어났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전이었다. 보통이라면 아홉 시가 되기도 전부터 눈을 떴을 텐데, 차선우는 별일이라고 생각했다. 모처럼의 휴일이니 예상에 없던 휴식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차선우는 습관적으로 액정을 두드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화면임에도 차선우는 위화감을 느끼며 금세 전원을 껐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아침까지 먹고 나서야 차선우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 녀석의 연락이 없었던 것이다. 어젯밤, 그 녀석이 징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었다. 한창 바쁠 때라서 내일은 하루 종일 업무에 매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차선우는 그 이야기를 왜 나에게 하느냐고 되물었다. 다소 매정한 물음에도 정세현은 굴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없으면 네가 쓸쓸해할 ..
"살별 세彗에 나타날 현現을 쓰네.""와, 바로 알아맞히는 사람은 처음 봤어! 선우는 한자도 잘하는구나." 자연스레 자신을 끌어안는 그를 모른 척하고 차선우는 민증에 찍힌 그의 이름을 손끝으로 훑어내렸다. 이름 옆에는 부드러운 낯으로 웃는, 지금보다 어린 티가 나는 그가 있었다. 머리카락도 눈도 밝은 색을 띠는 그는 어디서든 눈에 띌 터였다, 광채를 흩뿌리며 밤하늘을 가르지르는 혜성처럼. 한참 사진과 이름을 번갈아 보던 차선우는 느낀 바를 그대로 이야기했다.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해. 너와 잘 어울려.""그런 얘기, 많이 들어. 선우는 무슨 한자를 쓰는데?" 차선우는 대답 대신 메모지에 한자를 써서 내밀었다. 깨끗한 비洗雨라는 뜻이구나. 정세현은 단번에 그 한자를 알아맞혔다. 놈은 원체 모든 분야에서 아..
"형, 우리 헤어지는 게 어때요?"이별을 고했던 날에는 공교롭게도 눈이 내렸다. 신정까지 폭설이 내릴 거라는 소식을 전하듯, 내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저어기 잔잔한 바다처럼, 나의 마음도 동요할 기미조차 없었다. 그러나 형은 놀란 것 같았다. 당황한 얼굴에 분노가 빠르게 번졌다. 나는 그 표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 나를 사랑해서 짓는 표정일까, 혹은 그저 내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음에 분노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헤어짐이란 그런 것이었다. 형은 내 어깨를 세게 움켜쥐고 거칠게 물었다."그걸…… 네가 할 말이야?" "둘 중 누군가는 해야 하는 말이었어요.""내가 너를 어떻게 참아 줬는데!""그간 고마웠어요. 이제 참아 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 말하면서 나는 불현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