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e Bow Tie Hearts Blinking Blue Pointer
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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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 하루 종일 새카맸다. 푸름 한 점 없는 하루의 끝에서 나는 그 사람을 생각했다. 장마철도 아닌데 날씨가 몹시 궂어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출근길부터 길이 꽉 막혀 늦을 뻔했고 연습실에 당도하면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어젯밤 창문 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아 연습실로 비가 온통 들이쳤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악기는 습기를 잔뜩 먹어 축축 처지는 소리가 났다. 평소 실수가 잦았던 단원들은 오늘따라 더욱 부진하여 연신 사과를 해 왔다. 악장님, 정말 죄송해요! 공연이 얼마나 남은 줄 알기나 하느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와도 꾹 삼킨 채 나는 평소처럼 답했다. 괜찮습니다. 못된 마음을 잘 접어두고 나는 종종 창밖을 내다보았다. 적당히 그칠 줄 알았던 비는..

    우리의 파랑

  • #1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케이크들은 좋은 향기를 풍기고 포크들은 그에 반응하여 상대를 잡아먹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식인 충동을 느끼는 인간들이 판치는 현대 사회는……그다지 야만적이지 않습니다. 포크들은 위험군으로 분류되어 따로 관리를 받게 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사람을 잡아먹고 싶다는 충동에 스스로를 내맡기지 않기 마련입니다. 평생 채워지지 않을 굶주림과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더라도 말이죠. 포크들은 그걸 영혼의 갈증이라고 부르덥니다. 뭐, 그건 포크들의 사정이니 케이크인 저는 알 바 아닙니다. 호랑이를 걱정하는 토끼는 없잖아요.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해라고 부르세요. 나이는 스물 후반이고 바이올린을 조금 켤 줄 압니다. 저는 케이크 중에서도 유난히 수요가 없는 편입니다. 건강식품 비슷한..

    영혼의 갈증

  • 해: 테티스사월: 오케아노스 01.미트론 학술원의 유망한 학자인 나, 테티스의 ‘평생’을 바친 연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검증을 마쳤고, 다양한 개체에게 적용 후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기만 하면 수생 생물학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을 텝니다.나는 편안한 의자에 기대 앉아 저무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이 위업을 이루고 나면 별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일찌감치 죽고자 하는 열망은 없었지만 - 물론 고대 세계에서 ‘죽는다’라는 표현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만 - 별달리 더 살아갈 이유도 없었습니다. 이 별에서 해야 할 일은 완수했으니 돌아가는 게 순리에 맞을 것입니다. 참으로 정석적이고 지극히 일반적인 생애였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만족했습니다. …… 지금 생각해 보거든 어쩌면 체념..

    찰나의 존재

  • 1.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침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침에 눈이 내렸다. 사월의 눈을 떴을 때에는 곁에 해가 없었다.애기야, 벌써 일어났니? 사월은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창가의 커튼을 걷어내니 새하얀 바깥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 만물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얼어붙은 정원에도, 그 정원을 막아서는 울타리 위에도, 창문 문틈에도 무수한 눈꽃이 자리했다. 세상에서 가장 시들기 쉬운 꽃들이 눈이 시리도록 피어나 눈꽃의 화원을 이루었다. 사월은 그 풍경에 매료되어 잠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있었다. 창문에 손끝을 가져가거든 닿기도 전부터 서늘한 냉기가 감도는 것이, 꼭 엷은 얼음조각 같기도 했다. 그 너머로 바깥을 내다보면 바라보기만 해도 몸이 시렸다. 그런 중에도 침실 속 자신은 아늑하고 아득하..

    눈꽃의 화원